• 공유하기
산단 인사이트

올드 스쿨 산업단지, 미래 지향적 산업혁신거점이 되려면?

로테르담 혁신지구(Rotterdam Innovation District)의 시사점

글. 이윤석(국토연구원 부연구위원,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

꽤 오래 전부터 우리의 산업육성·산업입지 정책이 성숙단계에 접어든 대규모 공장 유치에만 집중해서는 곤란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덩치 큰 기업들을 어떻게든 지역으로 모셔 와서 꽉꽉 채워놓는 데 주력한 투자유치 중심의 올드 스쿨식 접근(Buffalo Hunting)이 아니라, 토양에 씨앗을 심는 것부터 시작해서 산업생태계가 지역에 뿌리내려 꽃을 피울 수 있는 접근(Economic Gardening)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문가들은 창업기업과 성장·성숙 기업, 교육기관 등이 한데 모여 혁신을 창출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산업 혁신형’ 모델을 모색해왔는데, 그중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개념이 바로 2014년에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브루스 카츠 등이 제시한 혁신지구(Innovation District)다. 이 글에서는 혁신지구의 대표적 사례로 해외에서 많이 주목 받고 있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혁신지구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로테르담 혁신지구 개관

지금은 로테르담 메이커 지구(Rotterdam Makers District)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진 로테르담 혁신지구1는 로테르담 도심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5km 떨어진 항만부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혁신지구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2015년에 발표되었으나, 그 단초가 마련된 것은 장기 방치된 조선소 부지의 재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2004년부터라 할 수 있다. 현재 로테르담 혁신지구는 ①마스(Mass)강변의 과거 로테르담 조선소(RDM) 부지였던 RDM Rotterdam과 ②강 건너편 메르베비에하펜(Merwe-Vierhavens, Merwe 지역의 4개 부두라는 의미) 지역인 M4H Rotterdam의 두 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전자인 RDM Rotterdam이 이 혁신지구의 출발점이자 그 에센스가 담긴 곳이다.

로테르담 혁신지구 위치 및 범위
자료: Simon van den Heuvel. 2017. p.3.

RDM 로테르담

RDM Rotterda m 의 RDM 은 Resea rc h , Des i gn , Manufacturing의 줄임말이다. 본래 RDM은 이곳에 위치한 로테르담 조선소(Rotterdamsche Droogdok Maatschappij)를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지금도 똑같은 명칭을 써서 제조산업과 교육의 혁신거점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나 의미심장하다. 이 용어의 전환이 여기서 벌어진 일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RDM Rotterdam의 핵심은 기존 조선소 건물의 내부를 개조해서 만든 RDM Campus인데, 그중에서도 꽃은 건물 내부의 RDM Innovation Dock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조선소의 메인 홀이었던 층고 12m, 23,000㎡에 달하는 탁 트인 공간으로, 한쪽에는 3개 대학교2의 교육·실습공간이 다른 한쪽에는 스타트업·중소기업을 위한 공간(12,000㎡)이 조성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약 1,200명의 학생들과 60개 이상의 기업들이 한 지붕 아래서 서로 부대끼면서 활발한 교류·협동을 통해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제조활동을 하고 있다. 학생들이 바로 옆에서 스타트업들이 실험하는 모습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이들과 서로 소통·교류해나갈 수 있는 개방적인 환경이 이곳에서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이자 로테르담 혁신지구라는 판을 키울 수 있었던 씨앗인 셈이다.

M4H 로테르담

RDM Rotterdam이 교육기관 및 스타트업 위주의 공간이라면, M4H Rotterdam은 RDM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첨단 제조기업 유치에 초점을 둔 대규모 지구라 할 수 있다. M4H의 면적은 약 1.2㎢로 RDM의 약 4배에 달하는데, 이 둘을 합하면 로테르담 도심과도 비슷한 크기다. M4H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RDM의 스타트업들 중 스케일 업 단계에 도달한 기업들이 자리를 잡아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성숙단계에 있는 외부의 첨단 제조업체들을 이곳에 함께 유치함으로써 로테르담 혁신지구를 명실상부한 제조혁신 허브로 키워내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이곳은 본래 과일 저장 및 운송을 위한 저온창고가 집적된 지역이었으나 상당수 기업이 떠나 로테르담 항만공사가 이런 창고 부지를 매입·재개발하여 제조업 입주공간을 조성 중이다. 아직까지 M4H 개발은 초기단계로 2017년에 항만공사가 저온창고를 ‘De Werkplaats’ (The Workplace)라는 기업입주 공간으로 재개발한 이후 2020년 2월 로봇, 3D 프린팅, 해양 자원재활용 관련 3개 업체가 최초로 입주한 상태다.

로테르담 RDM Campus 내 Innovation Dock 전경
자료: Claire Droppert, 로테르담 Rotterdam Make It Happen 웹사이트 http://rotterdammakeithappen.nl)
M4H 구역에 기업입주 목적으로 조성된 De Werkplaats 건물 전경
자료: Guido Pijper, 로테르담 Rotterdam Make It Happen 웹사이트(http://rotterdammakeithappen.nl)

맺는말

로테르담 혁신지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혁신적인 제조업체들이 자라나고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는 혁신생태계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단계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해 왔다는 점이다. 즉, 학생들과 스타트업들 간에 실질적인 교류를 통해 나온 혁신적인 생각들이 또 다른 스타트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런 젊은 기업들이 성장하면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스케일 업을 하면서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해서 궁극적으로는 혁신생태계의 한 축이 될 수 있도록 통합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스타트업 중심의 소규모 창업보육공간과 본격적인 제조기업 집적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단지(혹은 이들의 중간)의 두 가지를 절묘하게 버무린 셈인데,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시작부터 스타트업과 스케일업 기업들의 입장에 서서 차근차근 접근해나갔다는 점이다. 우리도 비슷한 취지의 정책들이 있었지만, 기존 산업단지 내에 창업보육시설이나 캠퍼스 기능 등을 ‘일단 집어넣고’ 나면 제조생태계가 뿌리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식의 너무 안일하고 단편적인 접근이 아니었나 싶다.3 스타트업과스케일업 기업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면서 작지만 보다 더 섬세하게 접근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1 혁신지구는 교육·연구기관, 성숙단계에 있는 기업들과 스타트업 및 스케일 업 단계의 기업들, 인큐베이터와 엑셀러레이터, 투자자, 기업가, 그리고 다양한 기술을 가진 근로자 등이 한데 어우려져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혁신을 창출하는 일단의 지역이라 할 수 있다(Katz & Wagner, 2014). 혁신지구의 가장 큰 특징은 혁신 주체간 일상적·실질적 상호작용에 기반한 개방적 혁신(open innovation)과 산업생태계 측면(innovation ecosystem)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Katz et al., 2015)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지금까지 도시와 동떨어져 제조공장만 잔뜩 모아놓은 산업단지 모델이나 고차 R&D 중심으로 외부와는 단절된 리서치 파크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서 주목받는 이유다.
2 우리로 치면 전문대(2-3년제)로 전문 직업훈련에 특화된 Albeda College, Zadkine College와 4년제 실무중심대학(Hogeschool)인 로테르담 대학의 공대 일부학과(산업디자인과, 건축과 등)가 입주.
3 산업융합지구나 강소연구개발특구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단순히 넓고 저렴한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것만으로 스타트업이나 스케일업 단계의 젊은 기업들이 입지여건이 좋지 않은 곳으로 모여들 것으로 기대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추진 중인 캠퍼스 혁신파크는 거꾸로 대학에 산업단지를 집어넣자는 접근을 통해 스케일업 단계의 기업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