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하기
기술이 만든 미래

스마트 그리드

전력 생산자와 소비자 간 쌍방향 소통을 실현하다

글. 서희동 참고. 넷제로 에너지 전쟁(정철균 외 저, 한스미디어)

사물인터넷(IoT) 기술의 발달과 빠른 보급으로 기계와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앞으로는 전깃줄과 대화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 댁의 전기 사용량이 갑자기 크게 줄었다고 알려주면 안부 확인차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어볼 수 있고, 오늘은 세탁기와 건조기를 몇 시에 작동해야 전기 요금이 저렴할지 물어볼 수도 있다. 스마트폰이 없는 생활을 이제는 상상할 수 없듯이, 전력망의 혁신인 ‘스마트 그리드’ 역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다.

에너지 흐름 체크, 실시간 교통정보처럼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고전압 송전망으로 먼 거리를 이동하고, 저압 배전망을 통해 곳곳의 전기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토머스 에디슨이 1882년 직류발전기를 통해 전구에 전력을 공급하고, 1893년 테슬라의 교류 전기가 산업 표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사람들이 전력망을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발전소에서 소비자에게 이어지는 전기 선로는 일방통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전력망의 개념을 바꿔 놓은 ‘스마트 그리드(Smart Grid)’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똑똑한 전력망’인 스마트 그리드는 기존의 전력 시스템에 ICT 기술을 입힌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쌍방향 이라는 것이다. 전깃줄에 흐르는 전기의 흐름은 물론 전력망을 구성하는 전선과 전봇대 등의 이상 유무, 전기 사용자의 소비 패턴까지 공급자와 소비자 양쪽 모두가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센서와 제어 시스템 등의 발전이 주요하다. 전력망을 모니터하고 보호하며, 자동으로 최적화된 운영까지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마치 교통정보를 확인하는 것처럼 에너지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스마트 그리드를 통해 전기 공급자는 전력망에 대한 모니터링과 제어를 비롯해 송·배전 활동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기존의 단방향 전력망에서는 전력 발전과 소비의 불균형이 일어나면 전력망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고, 최적화된 경로로 송전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스마트 그리드를 이용하면 전력망의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분석해서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심지어 정전이 발생해도 복원 시간을 크게 앞당길 수 있다.

소비자는 전기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전기 소비량이 많은 시간(=전기 가격이 높은 시간)을 피해 전력을 사용하는 식이다. IoT 기술이 더해진 냉장고는 스스로 이 시간을 피해 냉각기를 작동할 것이다. 또, 가정용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면 전기 소비량이 많은 시간에 가정에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고, 남는 전기가 있다면 전력망을 통해 판매할 수도 있게 된다. 여러모로 이득이다.

스마트한 전력 활용을 완성하는 기술들

스마트 그리드 기술의 또 하나의 장점은 기존의 전력망으로 관리하기 어려웠던 분산형 에너지* 자원(DER, Distributed Energy Resources)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전력 계통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기 소비자의 근처에서 소규모로 전력을 생산하는 태양광, 풍력 발전 설비 등이 분산형 에너지 발전의 대표적인 예시로, 기존의 화석 연료나 원자력 대신 재생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2023년 프랑스 파리 디즈니랜드에 준공 예정인 유럽 최대의 태양광 캐노피는 이곳에서 사용하는 전기의 17%를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글, 애플과 같은 거대 테크 기업들도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을 이용한 전기 자가발전과 소비에 참여하고 있다. 분산형 발전 시스템의 수는 계속 증가할 전망인데, 스마트 그리드를 통해 전기 소비량 변동 등을 분석하고, 전기 가격이 비쌀 때 분산형 발전원에서 생산한 전기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가격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전기 회사 입장에서도 분산형 발전이 전력의 수요를 분산시키기 때문에 비싼 발전소를 새로 짓지 않고도 전력망에 대한 전력 의존도를 낮추고 과부하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

스마트 그리드 및 분산형 에너지와 연관된 가상발전소(VPP, Virtual Power Plant)**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 개념이다. 가상발전소는 각각의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에서 생산될 전기량을 예측하고, 설비를 관리하며 전력 거래를 한 곳에서 가능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발전소처럼 동작한다. 소비자의 전기 소비와 전기 시장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가상발전소는 기존의 전기 소비자들이 공급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프로슈머(prosumer)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스마트 그리드로 그리는 미래 산업 혁신

재생에너지 리서치 및 컨설팅 회사인 클린테크 그룹(Cleantech Group)은 향후 5년에서 10년 사이에 상용화할 수 있는 기후 기술을 가진 비즈니스 기업을 ‘글로벌 클린테크 100 리스트’로 선정한다. 이곳에 오른 회사는 곧 투자자들이 관심을 두는 기술을 지닌 회사들로 볼 수 있는데, 지난 2022년에는 우리나라의 그리드위즈(GridWiz)를 비롯한 스마트 그리드 전문 회사 9곳이 이름을 올렸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스태티스타(Statista)는 오는 2026년 전 세계 스마트 그리드 시장이 우리 돈으로 6조 원이 넘는 5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2021년 미국은 스마트 그리드 연구 개발 등을 포함한 전력 인프라에 650억 달러(약 83조 원)를 투자할 것이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9년 산업부 산하 기관인 한국스마트그리드사업단이 출범한 이후 제주 구좌읍 일대의 스마트 그리드 실증단지 운영과 나주시의 스마트계량기 보급 사업 등을 거쳐 2022년 12월에는 광주·전남 공동 혁신도시 클러스터의 스마트 그리드 산업 활성화를 위한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지점이다.

스마트 그리드는 전력망의 효율과 안정성 증대에 크게 기여하지만, 통신망을 사용하기 때문에 정보의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개인의 전기 사용 패턴과 같은 정보는 단순히 전기 공급의 문제가 아닌 사생활 보호와도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이미 중국 및 러시아 해커의 전력망 침입 사고를 경험한 미국은 전력 인프라 보호법을 통해 꾸준히 전력망 보안 확대에 힘쓰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발생하는 위기와 기회를 잘 이해하고, 사회가 선순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마트 그리드 정책과 기술을 펼쳐 나가야 할 시기다.

* 분산형에너지: 우리 집, 또는 우리 지역에서 필요한 전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로컬(local) 에너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 태양광, 풍력, 폐기물, 소수력발전 등 지역의 지리·환경적 특성에 맞는 재생에너지 를 이용해 소규모로 전기를 만든다.
**가상발전소: 각 지역에서 생산된 분산형 에너지를 한 곳에서 총괄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발전소는 아니지만, 정보통신 및 자동제어 기술을 이용해서 하나의 대형 발전소처럼 작동하는 통합관리 발전 시스템이다.